피의 기사와 뱀파이어 여왕 1 환상문학 소설

  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입니다. 연재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도입부만 제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공개해두겠습니다. 언제 다시 지워질진 저도 몰라요. 제목은 <피의 기사와 뱀파이어 여왕>입니다.







< 피의 기사와 뱀파이어 여왕 >


1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는 허공에서 위아래로 고갯짓하다가 때때로 유리창을 두들겼다. 할머니는 요란한 바람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손녀를 위해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그동안 손녀는 방의 유일한 조명인 테이블 위의 촛불과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자신의 발, 그리고 할머니가 방금 걸터앉은 흔들의자를 번갈아 흘끔거렸다. 지금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잠들기 전 할머니의 동화를 듣는 시간이 온 것이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손녀의 눈이 호기심에 동그래졌다. 할머니가 손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출 때면 흔들의자도 따라서 삐걱 소리를 냈다. 손녀는 웃다가, 놀라다가, 다시 웃기를 반복했다. 집의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과 비가 정원의 풀과 나무를 열심히 흔들었다.
  그리고 동화는 끝났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불을 정리해 손녀의 발을 덮는 동안, 손녀는 동화의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손녀는 말했다.
  “할머니.”
  “왜 그러니, 써니?”
  “이야기 너무 재밌어요.”
  “그래, 좋은 꿈 꿔라.”
  “그런데요 할머니.”
  “왜 그러니, 써니?”
  “어제 학교에서 선생님도 동화를 말해주셨어요.”
  “어떤 내용이었니?”
  “음, 어떤 내용이었냐면, 피부가 눈처럼 흰 공주가 있었는데, 마녀가 그 미모를 샘내서 독이 든 사과를 공주에게 먹이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그 동화가 재밌었니? 할머니의 이야기만큼?”
  “재밌었지만, 할머니 것만큼 재밌진 않았어요.”
  “물론 그럴 테지.”
  할머니는 손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데요 할머니.”
  “왜 그러니 써니?”
  “할머니는 왜 그런 이야기를 안 해주세요?”
  “그런 이야기라니?”
  “선생님의 것 같은 거요. 왕자가 공주를 구하고 기사가 마녀를 물리치는 거요. 할머니는 항상...” 손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기사가 공주를 구하지 못하고 기사가 죽잖아요. 그리고 마녀가 공주를 죽이고요. 그래서 기사와 공주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해주잖아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내용의 동화가 있는 거란다 써니.”
  “어느 동화가 더 좋은 건가요?”
  “물론 할머니가 해주는 게 더 좋지.”
  할머니는 손녀의 코를 간질였고, 손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흰 이불 밑에 얌전히 파묻혀 있는 그녀가 귀엽다고 칭찬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손녀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요 할머니, 저번 학교의 선생님이요.”
  “제임스 선생님 말이지?”
  “네, 제임스 선생님은 그런 동화는 나쁘다고 하셨어요. 공주가 죽고 기사가 죽는 동화는 아이에게 나쁘다고 했어요.”
  “아니야, 할머니가 해주는 건 나쁘지 않단다. 할머니가 언제 써니에게 나쁘게 한적 있더냐? 그리고 어쨌든 제임스 선생님은 죽었지 않니.”
  할머니는 매일 밤 그랬듯 손녀의 이마에 뽀뽀 했다. 손녀는 답례로 할머니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고, 말했다.
  “제임스 선생님이 살해당했다는 게 정말일까요?”
  “뭐라고? 절대로 그렇지 않아. 제임스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란다. 경찰에서도 그렇게 발표했어. 어디서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를 들었니?”
  “토미가요.”
  “말썽장이 토미 말이니? 걔는 매일 너를 괴롭혔잖니.”
  “그건 맞아요.” 손녀는 이불 밑의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그런데 토미 말로는요, 제임스 선생님의 목에 커다란 이빨자국이 두개 있었대요. 꼭 누가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이요. 자기 아빠가 경찰하고 친해서 잘 안다고 그랬어요.”
  “써니, 그런 거짓말쟁이의 말은 믿지 마라.”
  “맞아요. 토미는 매일 거짓말만 하고 수업시간에 떠들고 나를 괴롭혔어요.”
  “그런 아이랑은 절대로 놀면 안 된다. 알겠지?”
  “알았어요, 할머니. 그런데요...”
  “왜 그러니 써니?”
  할머니는 손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망설이던 손녀는 잠시 할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게, 저, 할머니가 제임스 선생님을 죽인 건 아니죠?”
  “뭐라고? 내가?”
  할머니는 한참 동안 웃었다.
  “내가 선생님을 죽여?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날 봐라, 내가 그럴 힘이나 있겠니? 누가 부축해주지 않았으면 제임스 선생님 집의 계단을 올라가지도 못했을 거다.”
  “맞아요, 제임스 선생님은 튼튼하지만 할머니는 허리랑 다리가 불편하잖아요. 제임스 선생님은 덩치가 크지만 할머니는 작고요. 할머니가 제임스 선생님의 집을 다녀간 다음 날 제임스 선생님이 돌아가신 채로 발견됐지만, 그거랑 할머니랑은 아무 상관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이 동네로 이사 왔으니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단다. 써니, 이제 시간이 늦었다. 얼른 자야지.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학교에 가야 한단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 전에 오렌지 주스 한잔 마셔야지.”
  할머니는 머리맡에 미리 놓아둔 컵을 손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용물이 식어서 굳지 않도록 할머니가 따뜻하게 데워놓은 컵을 들고, 소녀는 천천히 마셨다. 비릿하고 붉은 액체였다.
  그것을 모두 마신 소녀는 혀로 입술과 송곳니를 쓰다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요 할머니.”
  “왜 그러니 써니?”
  “이게 정말 붉은 오렌지 주스 맞아요? 어제 학교에서 배웠는데 세상에 붉은 오렌지는 없대요. 그리고 오렌지 음료는 따뜻하지도 않고 비리지도 않대요. 그런 오렌지 주스는 없다고 하셨어요.”
  할머니의 얼굴에 근심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야 써니, 네가 마시는 건 선생님이 모르는 종류의 오렌지 음료란다. 열대과일이라서 선생님도 모르는 거야.”
  “열대 과일이 뭐예요?”
  “아주 더운 곳에서 자라는 과일을 말하는 거야. 일년 내내 비가 내리고 커다란 벌레가 우글거리는 숲에서만 자란단다. 아주 희귀한 과일이지. 건강에 좋아. 비타민과 비슷해. 써니 너는 몸이 약해서 오렌지 주스를 매일 마시는 거란다. 오렌지 주스가 싫으니?”
  “아뇨 좋아요. 비타민은 싫어요. 비타민은 쓰지만 오렌지 주스는 달콤해요. 하지만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혼자 마시는 건 힘들어요.”
  “아이들이 봤다간 네 음료를 다 빼앗아 먹을지도 몰라. 그러니 절대로 마시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선 안 된다. 써니 너 혹시 새로운 선생님에게 오렌지 주스에 대해 모두 이야기 한건 아니지? 제임스 선생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스를 보여주고 모든 걸 다 말한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그냥 붉은 오렌지에 대해서만 물어봤어요. 제임스 선생님에게 했던 것처럼 주스를 보여주진 않았어요.”
  “그래,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알았어요, 저, 그런데요, 물어볼게 있어요, 할머니.”
  “써니야, 너 오늘 질문이 정말 많구나?”
  할머니가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손녀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눈만 내밀었다.
  “폭풍이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혼자 방에 있기 싫어요. 비랑 바람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써니는 할머니가 귀찮지 않을까 염려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으나, 할머니는 전혀 언짢은 얼굴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엇이든 물어보렴. 그 대신 푹 자고 내일 아침에도 상쾌하게 일어나야 한다.”
  “알았어요. 꼭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할머니, 저기, 음, 우리 집 지하실에 누가 갇혀있거나 한 건 아니죠?”
  “왜 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지?”
  “지하실에서 남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요.”
  “그럴 리가 있니.”
  할머니는 컵을 챙긴 다음 천천히 손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촛불을 껐다.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단다. 바람소리를 잘못 들었겠지. 폭풍우가 불어서 네 신경이 날카로운가 보구나. 걱정마라, 내일 아침이면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있을 거야. 잘 자거라 써니. 좋은 꿈 꿔라.”



  손목과 발목이 밧줄로 묶인 채 지하실 바닥에 누운 남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신음은 밧줄이 몸을 압박하는 고통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입을 틀어막은 천 조각이 그의 호흡기를 답답하게 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숨을 쉬는 방식으로 숨을 쉬지 않았다. 단지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막기 위해 이를 악물면서 나온 신음이었다.
  붉고 가는 금속선이 남자의 발목 살갗을 뚫고 나왔다. 하지만 발목의 피부 신경은 이미 마취되어 있었으므로 남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붉은 금속선은 한쪽 끝을 마치 벌레의 더듬이처럼 발목 위로 주변을 더듬었다. 남자의 뼈와 연결된 반대쪽 끝은 살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금속선은 곧 발목을 묶은 밧줄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듬어 구조를 파악해냈으며, 갑자기 그것을 휘감았다. 금속선이 빠르게 진동하면서 열을 내자 밧줄이 타들어갔다. 줄이 결국 끊어지고 남자가 자유로워진 다리를 펴는 동안, 금속선은 순식간에 발목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몸속을 이동한 뒤 손목에서 튀어나와 같은 방법으로 손목의 줄을 끊었다.
  남자는 천 조각을 입에서 빼내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시끄러워 데이빗.”
  그는 중얼거렸다.



  컵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할머니는 써니의 새로운 담임선생의 집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혼자 있는 시간은 언제인지 등을 생각했다. 여차하면 써니에게 새로운 동네와 학교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지난 2년간 간헐적으로 그랬듯이 말이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굽었던 허리와 절룩거리던 다리가 자신도 모르게 펴졌고, 할머니는 그것을 의식하고 다시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몸이 불편한 노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계단을 내려왔다.
  그때 쿵하는 소리가 지하실 쪽에서 들렸다. 그건 마치 지하실에 묶여있던 남자가 줄을 풀고 일어나 지하실 문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절대로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자를 묶어놓지 않았는가.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은 거실과 부엌 사이의 복도에 있었지만, 할머니는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 깨끗하며, 소박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이었다. 그곳은 할머니의 큰 자랑이었다. 지난 주 근방에 사는 아주머니들을 초대해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다과를 대접하고 이웃의 호평을 끌어낸 것이다. 특히 장미 무늬가 수놓인 고급스러운 소파는 모두들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이 동네로 이사 오기 전의 이웃들도 그랬으며 제임스 선생님도 그랬다. 그 역시 소파에 앉았고, 편안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어쨌든 녀석은 죽었어.”
  할머니는 소파의 쿠션을 들추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칼을 꺼냈다. 칼은 사람의 배를 쑤시기에는 짧고, 팔이나 다리를 베기에는 너무 가늘었다. 목을 찔러 피를 낸다면 적당할 것 같았다. 할머니가 그런 용도로 쓴 적도 있었다. 다른 평화로운 용도로, 이를테면 요리를 할 때 쓰거나 다른 칼들과 함께 장식으로 걸어뒀던 때도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용도로 수많은 칼을 써왔다.
  이제 그녀는 써니를 위해 칼을 쓸 작정이었다. 금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하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었는지, 할머니는 걱정되었다.
  “빨리 잠들어야 남자를 해치울 텐데.”
  할머니는 남자의 비명 소리로 써니의 잠을 방해하기 싫었던 것이다.



  남자는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 거실로 통하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거실로 올라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도 알아.”
  남자는 중얼거려서, 머릿속의 소리에 대답했다.
  [신체가 전기 감전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도 그 점을 노릴 겁니다.]
  “안다니까.”
  남자는 감전 이후 계속해서 저려오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주물렀다. 하지만 처음 손이 마비됐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의 다른 근육도 더 이상 뻣뻣하지 않았다.
  [적과 싸우지 말고 순간이동으로 이곳을 벗어나기 바랍니다. 지금 무기도 없지 않습니까.]
  “안돼. 집을 꼭 뒤져봐야 해. 그리고 무기가 왜 없어?”
  남자는 장화 안쪽에 넣었던 단도를 꺼내 손에 쥐었다.
  [집은 나중에 수색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면 늦어.”
  그는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엿들었다. 그의 강력한 청력으로도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집 밖에서 지겹게 불어대는 바람과 내리는 빗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는 문을 열기 위해 힘껏 걷어찼고, 남자의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발길질에 문짝이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저에게는 그냥 평범한 집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 데이빗”
  남자는 목소리에게 대답하고, 문을 지나 아무도 없는 복도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동안에도 집에서는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의 소리가 그에게 경고한 건, 그가 복도를 벗어나 응접실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적이 머리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습니다. 발을 응접실 입구 천장에 붙이고 거꾸로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8, 9피트 떨어져 있습니다.]
  “......”
  [아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겁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이라면 한쪽 눈을 깜박여 주십시오.]
  남자는 한쪽 눈을 깜박였다.
  [좋습니다. 적은 무기를 들고 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응접실로 들어가면 뒤에서 공격할 것입니다.]
  남자는 눈을 깜박였다.
  [방금 눈을 깜박인 건 내 말에 수긍 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저 눈이 간지러워서 입니까?]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고 그의 목숨이 걸린 순간이며, 그가 이 싸움을 위해 지난 천년간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을 알면서도, 그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시끄러워 데이빗.”
  천장의 할머니가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이 남자의 목에 꽂히려는 순간 남자는 앞으로 몸을 굴렸다. 할머니가 바닥에 내려앉았다가 일어나고 공격자세로 몸을 추스르는 동안, 남자는 빠른 속도로 방향을 바꾸고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나이 팔십 먹었다는 노파가 생각보다 정정하군.”
  남자는 말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이어 천둥이 따라왔다. 불이 모두 꺼져있어 어두운 그곳에, 번개 불이 잠깐 집을 밝히면서 두 사람을 비췄다. 남자의 검은 웃옷과 바지, 가죽 장화, 손에 들린 칼이, 그리고 남자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할머니와, 그녀의 흩날리는 긴 흰머리, 입술 밖으로까지 삐져나올 만큼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 한손에는 칼을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총을 든 날렵한 모습이, 한순간에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할머니는 말했다.
  “줄을 어떻게 풀었지? 게다가 장화에까지 칼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어. 광선총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서 말이지.”
  “네가 다뤄온 인간의 다른 총들과 구조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나? 이를테면, 방아쇠를 당겨도 소용이 없다는 것 말이야.”
  “네 생각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있으니 걱정 마. 총이 지닌 화력이 우리에게 치명적이라는 것도 잘 안다. 너에게 역시 치명적이라는 것도 알지. 내가 당장 이 총을 쏴서 너를 날려버리지 않는 건, 너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서이다.”
  다시 번개가 치고, 불빛은 두 사람을 비췄다. 할머니는 남자에게 총을 겨눴다. 지구 어디에서도 만들어지지 않는 모양의 독특한 외양을 지닌 총이었다. 특히 복잡하게 새겨진 무늬와 많은 장식 때문에 마치 총이라기보다는 손에 들린 예술품 같았다.
  번개가 사라지고 집은 다시 어두워졌다.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팔십 살이 아니다. 너도 삼십대 후반의 남자로 보이지만, 절대로 삼십대는 아니겠지. 너는 몇 살인가? 천살?”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천살이 맞지? 그렇다면 너는 피의 기사인가?”
  “나는 여왕님을 모시는 사람일 뿐이다.”
  남자의 대답은 건조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여왕이 당신과 함께 있나? 우리가 꿈에서 본 것처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의 여왕이 살아있다면, 그녀는 『에너지』를 가진 마지막 일족이다. 그녀의 에너지만 있으면 우리는...”
  “낮에도 밖을 걸을 수 있고, 영생을 누리겠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겠지?” 남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 모두에게 복수할 때까지 이 전쟁을 끝내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나? 너희들은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 곳에서 원수를 만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나? 영겁의 거리가 떨어진 이 곳에서, 천년의 시간조차 잊혀진 이 별에서.”
  “입 다물어 애송아! 너는 우리를 원수라고 부를 자격도 없다.”
  할머니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우리 편이 아니라면 평민은 아닐 것이다. 아마 왕족이거나 왕족 옆에 붙어 우리를 괴롭히던 놈이었겠지. 그래, 노예들이 왕족을 죽인 건 사실이지만 우리들도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어. 우리는 고향별을 떠나면서 완전히 달라졌어. 네가 원수로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우리는 너의 원수가 아니야.”
  “나는 그저 천한 신분의 남자였을 뿐이다.” 남자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내 손에 뿌려놓은 피가 나를 기사로 만들었다. 복수를 마치는 순간까지 나는 싸울 것이다. 너희가 어떤 거짓말로 싸움을 회피하려해도 소용없다.”
  “그토록 복수가 하고 싶다면 왜 여왕이 직접 나서지 않는 건가?”
  할머니는 말했다.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총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가 살아있기는 한가?”
  [계속 말싸움만 할 겁니까? 이러다간 다른 뱀파이어들이 집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시끄러워 데이빗.”
  “지금 뭐라고 했지?”
  할머니가 물었다. 남자는 방금 그의 머릿속에서 들린 소리에게 대꾸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캐물었다.
  “혼자 중얼거렸지 않은가,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데이빗이 누군가?”
  “내 상상속의 친구다.”
  잠시 할머니가 어리둥절해진 틈을 타서 남자의 칼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칼은 그녀의 심장이나 머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아무 의미 없음을 남자는 알았다. 할머니도 남자도 외양은 인간과 비슷했으나 해부학적 구조는 달랐다. 칼은 할머니의 손에 들린 칼에 날아갔고, 그것에 꽂힐 듯하다가, 단지 부딪혀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두 개의 칼은 바닥을 굴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번개가 쳤다. 천둥이 이어졌다. 할머니는 총의 보이지 않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피의 기사가 예상했던 대로였으므로 남자는 미소 지었다. 총은 오로지 주인의 명령에만 움직였다. 칼은 도망가고 총은 입을 다물자 이제 주먹만이 남았음을 짐작한 할머니는 권투의 기본자세를 취했으나, 남자가 이미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린 다음이었다. 남자의 주먹은 할머니의 얼굴에 닿을 듯 했다. 할머니는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빠른 움직임으로 허리를 굽혀 남자의 손을 피했고, 남자의 배에 더 센 주먹으로 반격하는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봤다면, 지금은 차가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제임스 선생님을 제외한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이 많은 할머니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배를 얻어맞았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아서 전세를 역전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우려고 몸을 움직였을 때, 남자는 고통으로 욱신거리는, 하지만 데이빗의 노력 덕분에 빠르게 고통이 사라지고 있는 배를 부여잡고, 그녀를 향해 총을 쏘았다.
  빗나가면 안 돼, 남자는 중얼거렸다.
  다행히 총구에서 터져나온 『에너지』는 할머니의 신체에 명중했다.
  에너지는 가시광선만 보이는 인간의 시력으로는 일직선의 밝고 흰 빛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이전에 에너지를 맞은 자는 그 총을 [광선총]이라 표현하고 쓰러졌었다. 에너지는 절대로 광선이 아니었지만 보기에 레이저 광선과 비슷한 건 사실이었다. 그것에 맞아 쓰러지면서 할머니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곧 그녀는 정신을 잃었으며 이윽고 신체가 모든 움직임을 정지했다. 할머니의 시체는 발화하더니 열과 빛을 내면서 분자 구조가 약해졌다. 총이 내뿜은 에너지의 작용이었다. 시체는 연기와 재와 먼지로 변해 부서졌다.
  때맞춰 폭풍우가 사라지면서 집은 조용해졌다.
  소리는 이제 오직 남자의 머릿속에서만 들렸다.
  [나는 상상속의 친구가 아닙니다. 당신의 신체 안에 있긴 하지만 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내 이름은 데이빗입니다.]
  “농담이었어, 데이빗”
  남자는 머릿속의 소리에게 대답했다. 그가 시체를 발로 걷어차자 재는 천천히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형체를 유지한 것은 할머니의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였는데, 남자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할머니가 사라지고 바닥에 남은 것은 옷과 장신구 신발 등이었다. 남자는 면 원피스의 주머니를 뒤지고, 검소한 장식의 목걸이와 반지를 유심히 살핀 다음, 그가 원하던 물건과는 모두 상관없음을 확인하고 그냥 바닥에 내던졌다.
  “분명 이 집 어디엔가 있을 거야.”
  [도대체 뭘 찾는 겁니까?]
  데이빗이 말했다. 남자는 시끄럽다는 답변으로 데이빗의 질문을 일축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대화는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아이의 비명에 파묻혔다. 어느 새 일층으로 내려온 꼬마가 재로 변해 흩어진 할머니의 시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해.”
  남자는 말했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안고 있던 곰 인형을 꽉 움켜쥔 채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니까!”
  남자가 꽥 소리 지르자 그제야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이 할머니를 죽였나요?”
  “죽이지 않았어. 『천국』으로 보냈다.”
  “그게 그거잖아요!” 아이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흘러나와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저씨는 강도죠? 당장 경찰 부를 거예요. 아저씨처럼 나쁜 사람은 감옥에 가야 돼요!”
  “죽이지 않았다니까. 천국으로 보내는 것과 죽이는 건 달라. 그리고 너도 천국으로 가야한다.”
  “싫어요! 난 안 죽을 거예요.”
  아이는 입을 다물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앉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말했다.
  “죽이겠다는 게 아니야, 천국에 보내주겠다는 거다.”
  “천국이고 뭐고 다 싫어요!”
  “꼬마야, 너는 밥을 먹는대신 피를 마시지. 안 그러니?”
  남자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피가 아니라 붉은 오렌지 주스라고 할머니가 그랬어요.”
  “그 따위 오렌지는 어디에도 없어. 그건 인간의 피야. 너는 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뱀파이어』야. 어떻게 인간의 피를 쉽게 소화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거부반응이 있을텐데. 엄청난 비밀이 네 몸속에 숨어있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해부를 해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군.”
  “앞으로는 오렌지 주스 대신 비타민을 먹을 게요. 그러면 천국에 안 가도 되나요? 제발 저를 천국에 보내지 마세요.”
  “천국에 가면 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어디에나 피가 흘러. 하늘에서도 핏빛 비가 내리고 강에도 물대신 피가 흐르지. 모든 피가 다 네 거야. 피를 컵에 담아 마시지 않아도 돼. 나무에서 열리는 신선한 과일을 따면 그 안에 피가 있어. 네가 마시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지.”
  “진짜요?”
  “그래.”
  남자의 제안에 아이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걸 남자는 표정을 통해 눈치 챘다. 작고 귀여운 머리통 속의 앙증맞은 뇌에서 어떤 계산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울음마저 멈췄다. 남자는 아이의 금발머리를 쓰다듬었고, 그의 두텁고 큰 손은 여자 아이의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한데로 묶은 머리끈에 잠시 멈췄다. 머리끈에는 작은 구슬이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구슬을 만지면서 그것의 재질을 가늠해 보았다.
  남자는 소녀를 유혹했다.
  “거기서는 피를 몰래 마시지 않아도 돼. 너처럼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천국에서 모여 살지.”
  “할머니도 천국에 있어요?”
  “그곳에서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
  이제 여자 아이는 공포를 잊어버리고 남자를 마주보았다. 심지어 남자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강도에요?”
  “너 같은 뱀파이어를 구원하는 피의 기사다.”
  “나는 뱀파이어가 아니에요. 나는 사람이에요. 내 이름은 마가렛 써니 펜덜스톤이고, 여섯 살이고, 제3도시 공립학교의 일학년이에요.”
  아이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운 자기소개를 또박또박 말했으나 남자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광선총을 아이의 머리에 지긋이 대었다.
  “아니, 너는 뱀파이어야. 뱀파이어는 천국에 가야 돼.”
  “천국에 반드시 가야하나요?”
  “그래.”
  “그러면 곰 인형을 가지고 가도 돼요?”
  아이는 안고있던 곰 인형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떠나게 되면 홀로 남게 될 곰 인형이 걱정됐던 것이다.
  “아니.”
  남자는 딱 잘라 대답하고, 광선총을 소녀에게 쏘았다. 총구에서 흘러나온 에너지는 아이의 심장과 두뇌에 강한 충격을 주었고 소녀는 쓰러졌다. 남자는 소녀의 시체가 재로 변해 사라지는 동안, 손가락에 남은 머리끈과 그것에 달린 구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소녀의 몸은 사라졌으나, 의식은 죽지 않았다. 감각은 오히려 또렷했다. 바닥에 버려둔 몸이 재로 변해 사라지는 동안 정신은 둥둥 떠올랐고, 남자를 벗어나 천장에 닿았으며, 그리고 천장을 통과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이해 못할 변화에 놀랐던 소녀는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함으로 금세 공포를 잊었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두 팔을 벌리자 어느 새 산을 넘었고 다시 발을 구르자 대기권 밖에 있었다.
  그곳에 소녀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밝은 점 하나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점에게 몸을 맡겼다. 곧 아주 빠른 속도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밝은 점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빛보다도 빠른 초자연적인 속도로, 끌려 들어갔다.
  점 안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소녀는 풀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전에는 본적 없던 경치에 압도되어 몸을 떨었다. 자주색 하늘과 붉은색 땅이 주변에 있었다. 이마에 내리쬐는 햇빛은 하늘에 박힌 두 개의 푸른색 태양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발밑의 풀은 모두 검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곳이 싫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졌고 걸음은 곧 경쾌한 리듬을 탔다. 그녀는 들판 한가운데 홀로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무엇이 이끌리는지 모르지만 나무는 매력적이었고 소녀는 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나뭇잎이 들판에 자라는 풀만큼이나 검은 이상한 나무였다. 그리고 소녀가 본 어느 나무보다도 더 컸다. 커다란 산 같았다. 나무에 뻗은 수십만 개의 가지에는 하나씩 하얀 열매가 꼭 검은 종이 위에 찍힌 흰 점처럼 박혀있었다. 열매는 꼭 오렌지처럼 생겨서, 소녀는 흥분했다. 이것이 천국에 있다는 그 붉은 오렌지일까.
  나무의 거대한 줄기 밑에서는 액체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소리에 맞춰 수많은 가지가 가늘게 떨릴 때도 있었다. 만약 평범한 어른이 그 광경을 봤다면 나무에 맥박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녀는 가지로 손을 내밀어 오렌지처럼 생긴 열매를 잡아 당겨 뜯어냈고, 열매가 떨어진 자국에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소녀가 오렌지를 깨물자 향이 입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몸이 반응했다. 잇몸에서 송곳니가 튀어나와 열매의 표면에 구멍을 뚫고 구멍을 내 즙을 더 쉽게 빨아들이도록 만들었다. 혀와 목구멍은 액체를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였다. 맛있었다. 그녀가 항상 원했던 맛이 액체에게 있었다. 할머니가 주던 오렌지 주스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것보다 더 좋았다.
  “써니.”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는 남자의 말처럼 살아서 그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가 먼지로 변하는 걸 봤는데 어찌된 일일까? 심지어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등이 아프거나 다리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할머니에게 안긴 다음,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나무에 붉은 오렌지가 잔뜩 열려 있어요.”
  “그래. 마음껏 먹어라.”
  “할머니, 여긴 열대우림인가요?”
  “아니야.”
  “그럼 어디에요? 천국인가요?”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말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요?”
  “아니, 죽지 않았어. 우리는 잠시... 유배됐단다.”
  “유배가 뭐예요?”
  “나중에 말해줄게.”
  “나 오렌지 더 먹어도 돼요?”
  “그래라.”
  소녀가 나무로 돌아가 마구 열매를 따서 치마에 담는 동안, 할머니는 시선을 돌렸다. 칼을 한쪽에 숨긴 장화를 신은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두 개의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난 남자의 외모는 평범했다. 키와 덩치는 큰 편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크지 않았다. 외모도 옷차림도 분위기도 모두 특별하지 않았고, 일부분은 낡았으며, 일부분은 겸손했고, 전체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평범했다. 정말 평범한 남자였다. 그에게서 이상한 부분이라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광선총과 놀라울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그 둘만 아니라면 나는 패배하지 않았을 거야,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외쳤다.
  “이곳을 빠져나가 너에게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하지만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낀 후,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도주는 불가능해. 영혼이 되돌아갈 육체가 없으니까.”
  “다른 이들이 나와 써니를 위해 또 다른 육체를 합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이곳에서 꺼내 새로운 몸에 넣어주겠지. 나는 내 손으로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 다음엔 여왕을...”
  “꿈도 크군. 그 전에 네 친구들을 모두 이곳에서 만날 것이다. 기대해도 좋아.”
  분노한 할머니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남자에게 덤볐다. 두 번째 권투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남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왼손 검지와 중지를 교차해 십자가를 만든 다음 말했다.
  “여왕 폐하 만세.”
  주문과 함께, 천국을 감싸고 있는 기계가 작동했고, 남자의 영혼을 천국에서 끄집어냈다. 그의 영혼은 지구의 육체로 되돌아갔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남자의 모습은 사라졌으며 할머니의 분노가 실린 주먹은 그냥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고함이 들판에 울려 퍼졌다.



  거실 앉아있던 남자는 눈을 떴다. 그는 장미 무늬의 소파에서 일어났고, 재로 변한 할머니와 소녀의 육체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떠나있는 동안 육체를 관리했던 데이빗이 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동안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고마워 데이빗.”
  [두 뱀파이어는 완전히 천국으로 전송됐습니까?]
  “확인했어.”
  [벌써 열 다섯 명의 뱀파이어를 잡았군요.]
  “그리고 수천 마리가 더 남아있지.”
  남자는 잿더미에게서 고개를 돌려 지하실로 내려가 코트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것의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다음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서서,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멍한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 데이빗이 참견했다.
  [당신은 인간의 기호품을 좋아하는군요.]
  “맛이 기묘해.”
  남자는 연기를 내뿜고 바닥에 부주의하게 재를 털었다.
  [벌써 오늘만 해도 스물 두 개의 그것을 소비했습니다. 담배라고 부르는 것, 맞죠?]
  “스물두 개? 몰랐군.”
  [신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물질이 수도 없이 포함돼있는 건 압니까?]
  “몰라.”
  [그 중에는 당신과 나의 수명을 단축하는 물질도 있습니다.]
  “고생 좀 해봐.”
  거실에서 나온 남자는 대문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집으로 들어올 때 손잡이를 잡았다가 받은 전기충격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가 쇼크에서 깨어났을 때는 손과 발이 줄에 묶여있고 광선총은 허리춤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지하실에 갇혀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극도의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는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피의 기사이긴 했어도 정식 기사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니라 무예가 서툴렀고 지식도 부족했으며, 스스로도 기사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건 단지 여왕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 뿐이었다. 하지만 가사상태에 빠진 여왕을 깨우려는 그의 목표가 충성심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실패하고 마는가, 라는 절망감이 남자가 느낀 두려움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지하실에서 탈출했고 두 명의 중요한 뱀파이어를 잡아 천국으로 보냈다. 큰 일 하나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이제 더 큰 일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바람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남자는 레인코트의 칼라를 눕혔다. 불을 끄지 않은 담배를 집 안으로 던지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열린 대문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나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집 주변을, 특히 담장과 그것에 얽혀 있는 전기배선을 꼼꼼이 탐색했다.
  데이빗이 말했다.
  [집 안에는 전기 설비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전등조차 쓰지 않고 촛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대문과 담장에는 도둑을 막는 고압전기충격 장치를 해놓았군요. 이상하단 생각 안 듭니까?]
  “들어.”
  [당신의 가설은 뭔가요?]
  “할머니가 미쳤다는 것?”
  [흠, 제 결론은 특수한 이유로 집 안에서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에너지』가 전기 근처에서는 불안정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전기를 보안용으로 사용했다는 것도.”
  [집에 있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죠. 이를테면, 에너지가 압축되어 있는 어떤 물건을요.]
  “혹은 손녀를.”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펑, 소리와 함께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집이 본격적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곧 소방 우주선이 이곳으로 날아올 겁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떠날 시간이 됐군. 충고 고마워.”
  [이제 어디로 갈건가요?]
  “다른 뱀파이어를 찾아야지.”
  [순간이동으로 가십니까?]
  “에너지를 아껴야지.”
  남자는 주먹에 쥐고 있던 소녀의 머리끈을 마지막으로 자세히 바라본 다음,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이 당신이 찾던 물건입니까? 우리가 찾으려 애써온 그 물건일 까요?]
  “아직은 몰라.”
  [언제쯤 알게됩니까?]
  “네가 입을 다물고 조용해질수록 더 빨리 알게 될 거라고 누가 그러더군.”
  [흠.]
  남자는 광선총을 허리춤에 찼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길게 휘파람을 불자, 어둠 속에 조용히 숨어있던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시동이 걸렸다. 그에게 저절로 다가온 오토바이에 능숙한 동작으로 올라탄 남자는 손에 장갑을 끼고, 계기판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문질러 닦고, 운전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특수한 메커니즘을 사용해 중력을 밀어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석유로 움직이는 바퀴를 이용해 앞으로 나아갔던 자신의 선조들과는 달리 이 오토바이는 바퀴도 석유도 없이 길을 멋지게 질주했다.
  남자는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떠드는 데이빗의 말을 일부는 무시하고, 일부는 참고하면서 큰길에서 더 큰 길로 그리고 더 넓은 고속도로로 나아갔다.
  그동안 한때 점잖은 할머니와 귀여운 여자아이가 살았던 집에 소방 우주선이 도착했고 호기심에 찬 이웃의 자동차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이 화재의 원인과 이웃의 생존 여부를 토론하는 동안 남자의 오토바이는 시골을 벗어나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진입하고 있었다.
  2189년의 제 3 도시 밤하늘에는 수백층 높이의 건물과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모노레일과 비행선이 가득했다.




께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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