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하비’라는 원작의 캐릭터를, 인간 성격의 한 부분을 극대화한 인물을 일단 창조한 다음 캐릭터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만화 속 캐릭터라기보다는 자신의 성격을 빗댄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상한 인간에 가깝다. 배트맨은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싶지만 사회에서 허용된 방법이 아닌 어둠에 숨어서 범죄자를 몰래 때려잡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천한다. 그는 가끔 경찰과 협력하는데, 그가 맡은 역할은 법이 당장 해결하지 못하거나 혹은 법망 사이로 빠져나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처리하는, 일종의 필요악을 행하는 악역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라도 하듯 박쥐 가면 뒤에 숨어 산다. ‘하비’는 배트맨과 같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즉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한다. 그는 배트맨 보다도 더 의욕과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인데, 반짝거리는 얼굴만큼이나 머리도 총명하고 성실하며 무모할 만큼 용기에 넘치는 그를 배트맨은 영웅이라고 믿는다. 나는 왜 배트맨이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하비처럼 열정에 불타 무모하게 돌진했다가 이미 한번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배트맨은 그가 해낼 수 없는 걸 하비가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지쳐있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의욕에 넘친 하비를 동경했을 수도 있겠다. 이 두 사람이 같은 목표로 뭉치고, 그 사이에 어떤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성실하게 살자는 순진한 믿음만으로 행동하는 형사 ‘고든’이 합세하면서, 셋은 팀을 이뤄 서로의 단점을 보충해 도시의 악을 완전히 제거하려 한다. 그들의 행동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메커니즘을 관찰하는 것이 영화의 목표로 보인다. <다크 나이트>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는 배트맨 만화 속의 고담시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 가깝다. <배트맨 비긴스>에서 고담 시티적인 공간은 모두 파괴되었고, 이제 고담은 미국의 어느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면 서울이라고 믿어도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아무 다를 바 없다.
하비와 배트맨의 합공에 수세에 몰린 악당들은 조커를 고용해서 배트맨을 죽이려 하는데, 조커는 영화에서 언급되는 대로 싸이코패스이며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돈도 명예 때문도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이다. 그는 그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고통에조차도 무감각하다.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나 테러리스트의 행동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조커는 그에게 권력과 돈이 주어지자 가장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고 다니면서 사회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커 같은 악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악당이 우리 사회의 모순과 만났을 때 사회가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가 그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는 조커가 행동을 시작하자 예측을 벗어난 속도로 고담 시티가 분열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크리스 놀란의 영화는 지적이다. 단순히 그의 영화가 복잡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헐리웃 블록버스터에서 느껴지는 단순한 감수성, 어딘가 열두 살 남자아이의 몽상 같이 단순하고 유치한 감성이 제거된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어른의 영화이며 지적인 어른의 영화이다. <다크 나이트>는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어른스러운 블럭버스터이다. 그는 지적인 태도로 영화를 다루기 좋아하며, 이런 지적인 태도를 배트맨 시리즈에서 유지하면서 여러 도덕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의 끔찍한 악행에 의해 사회와 인간성의 모순이 파헤쳐 지면서 일련의 회의적인 질문이 튀어나오는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고담 시티를 구하려고 하는 배트맨과 고든과 하비이다. 셋 모두 스스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조커의 치밀하고 끔찍한 질문에 차례대로 이성이 파멸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돌진하는 서사의 힘을 믿고 달려간다. 여러 사람의 지적대로 영화는 기승전결 없이 절정만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은 <배트맨 비긴스>에서 기승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리고 각본이 치밀하며, 크리스 놀란이 스토리 텔링에 능한 연출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장점은 영화의 질주하는 서사에 속도를 더하고, 클라이막스인 자동차 추격신에 이르면 근사한 액션과 결합하면서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끌어낸다. <다크 나이트>는 블록버스터 시즌의 액션 영화로서도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클라이막스에서 레이첼이 죽고, 하비가 파멸하고, 고든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배트맨이 정체를 들킬 뻔 하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세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던 조커의 질문은 점점 거대해진다. 조커는 그가 원했던 대로 고담 시티를 상대로 질문을 던진다. 배트맨이 영화의 마지막에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끄집어내서 좋으냐’라고 조커에게 묻는데, 조커가 배트맨과 고담시티에게 던진 질문은 조커는 사회적 실험이라고 표현 하지만 정당한 게임은 아니다. 레이첼과 하비 중 어느 쪽을 먼저 구할 거냐고 묻는 것이나, 리즈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놀이, 두 배 중 어느 쪽이 먼저 터질까요 같은 놀이는 적어도 정당하지는 않다. 단지,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상황에 닥칠 때 겪는 분열을 상징하고는 있다. 조커는 그 분열을 바라보면서 낄낄대고 재밌어 하지만 마지막에 두 배 중 어느 쪽도 터지지 않아 게임에서 지자 결국 배트맨에게도 져서 잡히고 만다. 조커가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지루한 연설을 배트맨에게 풀어놓는 동안, 예상되어있던 대로 이번에는 하비가 하비 투 페이스가 되어 배트맨을 공격한다. 하비의 몰락은 예정된 결과였다. 감독도 전반에 복선을 깔아놓았고 사실 그의 추락은 추락 자체가 놀랍기 보다는 그가 추락하는 모습을 통해 크리스 놀란이 보여준 신념, 즉 순진한 중산층적인 믿음을 깨는 태도, 이를테면 우리가 조금만 더 정의롭게 살려고 애쓰면 세상이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는 순진함을 공격하는 태도가 더 볼만하다.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파멸하는 상류층 부자 하비와, 역시 순진해 보이지만 파멸하지는 않는 가난한 서민 고든의 대비를 보여주면서, 크리스 놀란은 정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신념은 의외로 얄팍한 구석이 있으며, 정말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신념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이겨내는 깊은 인간적인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배트맨 비긴스>에서 브루스 웨인이 범죄 집단에 직접 들어가 고생을 하고 좌절할 때 한번 보여준 것이지만, 크리스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서 사회 전체로 확대해 더 큰 결론을 끌어낸다. 크리스 놀란에게 현실은 우리의(하비의) 추측보다 훨씬 복잡한 곳이고, 이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든처럼) 강한 의지가 요구되며, 단순히 나쁜 놈(조커)을 좋은 놈(배트맨)이 처치하면 사회 정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 이미 모순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는 실현되기 어려우며, 우리의 생각보다 사회는 쉽게 무너질 수 있고 그 가속도를 제어하기도 어렵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다크 나이트>를 통해 강렬하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재현해 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크리스 놀란이 결말에서 영화를 봉합하는 방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두 배 중 어느 쪽도 터지지 않는 이유는 너무 안이한 연출로 넘어갔다. 두 배가 다 안 터진다는 결론도 그다지 믿을 만 하지 않는데, 믿을 만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거라면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것, 배트맨이 하비를 거짓말 속에 묻고 자신을 ‘어둠의 기사’로 칭하는 결말의 태도 등은, 배트맨이 자신이 일종의 필요악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의 위치를 합리화 하는 과정을 말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설득력이 떨어져서 거의 작위적인 결말로 보인다. 설득력 없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건 <배트맨 비긴스>에서도 반복됐던 태도이고, 이전 영화 <프리스티지>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은 반전만을 믿고 영화를 복잡하게 벌려나갔다가 결말에서 봉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 <다크 나이트>를 봉합하는 크리스 놀란의 태도는 현명하지 않다. 오히려 이를 영화 밖에서 바라본다면, 억지로 봉합하지라도 않으면 결국 파멸을 막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역설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나는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두 편에서 연속되는 주제는 ‘파괴’라고 생각한다. <배트맨 비긴스>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배트맨이 태어났고, <다크 나이트>에서도 배트맨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파괴되며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로 거듭났다. 우리 사회는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모순 덩어리이지만 크리스 놀란은 꼭 나쁜 결말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며 봉합해 영화를 끝냈다. 하지만 현실이 정말 봉합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